아이슬란드에서 온 베스투르포트 극단의 <파우스트>를 보았다. 
연극 담당은 아니지만 담당 기자의 부탁으로 우연히 보게 됐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원래 연극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의 또 다른 변주인 뮤지컬을 포함해)
몇 편 연극을 보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영화를 보는 뇌로 연극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때 연극은 시시해지기 시작한다. 
단적인 예로 연극에는 클로즈업이 없다.
아, 클로즈업 된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이 주는 강력한 정서란.
연극에는 줌도 없다. 팬과 틸팅도 당연히 없다.
컷과 컷으로 이어지는 몽타주는 말할 것도 없다.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영화와 달리 연극 만이 가진 감흥은 무엇인가.
굳이 스스로 찾아 헤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는 그 감흥의 근원을 알지 못했다.
오늘 <파우스트>를 보기 전까진. 






<파우스트>의 특징은 국내에서 제목에다 덧붙인 '아크로바틱'이 아니다.
그저 아크로바틱이 문제였다면 그것은 그저 서커스에 불과했을 것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아크로바틱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그것은 바로 무대공간이다. 
공중에 쳐진 대형 그물.
만약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무대 바로 위에 그물이 쳐져 있다면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물의 크기는 가로가 11m, 세로가 15m에 이른다. 
쉽게 말해 객석 위를 뒤덮는다는 얘기다.
배우들은 무대와 그물 사이를 종횡무진, 동분서주, 설왕설래하며 오간다.

이때 그물은 배우들의 아크로바틱한 연기의 전시장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 창조된 무대의 공간이다.
극중에서 젊은 요한이자 아스모데우스를 맡았고,
작가이자 베스투르포트 극단의 공동 설립자인 뵈른 홀리누르 해럴드손은
이를 두고 '공간의 탐험'이라고 불렀다.

없던 공간이 새로 생겨나면 연출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연출의 새로운 가능성은 새로운 미학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때 매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악마들이 어슬렁거릴때 그물은 지옥이 된다.
그때 관객은 지옥의 밑바닥에서 꼼짝없이 악마들을 바라봐야 한다.
여기에 그물의 탄력이 더해지면서 악마들의 걸음은 더욱 기괴한 낯선 움직임이 된다.
 
파우스트의 구애로 인해 그레타와 그녀의 오빠가 그물 위에서 갈등을 빚을 때
그때 관객은 집 안 바닥에서 그들을 올려다봐야 한다.
그들의 갈등이 전하는 파국의 감정은 훨씬 불길해진다.

무대를 내려다보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말하자면 신의 관점에서 어린아이의 관점으로의 전환.
이 차이가 전해주는 정서의 오르내림.
이것은 너무나 새로운 체험이다. 

앞서 언급했던 해럴드손은
"할 수만 있다면 관객 모두를 그물 위로 떨어지도록 이끌고 싶었다.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새로운 체험을 공유하고 싶었다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아이슬란드란 추운 나라에서 온 것 치고는 너무나도 따뜻했다. 

[ YTN : 파우스트, 공중을 넘나들다 ] (-> 클릭)  

추신.

<파우스트>에 음악 얘기를 지나치기 어렵다.
물론 조지 마이클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도 있지만
극에서 악마의 유혹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포스트 펑크 스타일의 음악이다.
이는 닉 케이브와 워렌 엘리스, 이 둘의 공동 작업이 이끌어낸 결과다.
이 둘은 코맥 매카시 원작의 영화 <더 로드>에서도 작업했다.
이중에서 닉 케이브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빔 벤더스가 록 음악광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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