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유명한 격언. 

한 편의 영화를 천 명이 보면 그 영화는 곧 천 개의 영화가 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마음 속에 전혀 다른 영화로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뇌의 프로세스가 다른 누군가와 똑같이 작동하는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 각자의 영화관, 혹은 리좀으로서의 영화.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마음 속에는 

영화사적 이유나 미학적인 이유와는 거리가 멀고,

정치적인 이유와는 더더군다나 관계가 없는,

다른 이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아니, 남들이 공감을 하건 말건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오직 나만의 이유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나만의 이유라는 것. 

그것은 취향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사소해 보이고

운명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거창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결국 내 삶과 이어진 어떤 끈 같은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올해 본 영화 가운데 <용의자>가 그렇다.

원신연의 네 번째 개봉작인 <용의자>는 

가족을 잃고 남한으로 넘어온 북한의 전직 특수요원이 

국정원에게서 누명을 쓰고 대기업 회장을 죽인 용의자로 몰린 가운데 

복수와 진실을 위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린 영화이다.



용의자 (2013)

The Suspect 
7.8
감독
원신연
출연
공유, 박희순, 조성하, 유다인, 조재윤
정보
액션, 드라마 | 한국 | 137 분 | 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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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아득해질만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말하자면 리비도가 충만한 것이 미덕인 영화이다.

하지만 이 리비도를 지탱하는 운동의 방식이 

이미 10년도 더 전에 세상에 등장한 <본 아이덴티티>를 시작으로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본 시리즈에서 

이미 매우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취가 곧 한계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장면이다.


주의. 

이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은 없다.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미안할 따름이다.



영화가 클라이막스로 치다르기 직전, 

살인 용의자로 몰린 주인공 지동철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한강으로 뛰어든 뒤 자취를 감춘다.

주 기자는 소나기처럼 퍼붓는 경찰의 총알 세례에도 유유히 지동철이 사라진 바로 그 현장에서 

중계를 탄다. 그런데...


"경찰은 정보기관과도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검문검색을 강화해 살인 용의자 지동철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만다.

선배 기자(였지만 관련 음모를 파헤치다 해직당한) 최경희로부터 살인 사건의 배후를 밝힐테니 

중요한 자료를 갖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개고생하기 싫어서 적당히 뭉개고 있던 상황이다.  



주 기자를 열심히 화면에 담고 있던 중계 카메라맨도 낌새를 눈치채고 

'너 대가리에 총맞았냐'는 표정을 지어보지만 

그게 뭐 대수냐는 듯 그는 쓴웃음만 짓는다. 그리고는...



"내가 불알 달고 태어나서 쪽팔리게 씨발!"이라고 외치며

마이크를 한강 다리 난간에 부서져라 내리친 뒤 온 힘을 다해 허공으로 던져버린다.



그의 이런 결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간단하다. 

지동철이 살인 용의자라는 팩트가 그릇됐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경찰이나 국정원을 통해 흘러나왔을) 그 그릇된 팩트를 

앵무새처럼 나불거리는 자기 자신이 기자로서 쪽팔렸던 것이다. 


기자가 중계 도중 말을 멈추는 것은 대형 방송 사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을 멈춘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마이크를 내리꽂고 냅다 던져버린다.

더군다나 그 마이크에는 YTN이라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달려있다.

다시 한 번 반복.

이 영화에서 그는 YTN 기자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왜 내 심금을 울리는가.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비록 영화 속이지만, 그는 나의 동료이다.

더군다나 그 장면에는 나와 내 주변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해야 할 보도를 하지 못하거나 (기자협회보, 국정원 회오리 휩쓸린 YTN)

언급해야 할 대상을 언급하지 못하는 (미디어스, "박근혜 대통령은 YTN의 성역입니까?")

무슨 음모론에서나 나옴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마이크를 내던지는 이 장면은 

동료들 가운데 아직 아무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는 품었음직한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러니 어찌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은 내 말에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런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영화와 엮는 것은 유치한 놀음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대꾸할 생각이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어쨌든 그 안에서 내 삶의 단편을 보았다고.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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