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든 생각. 영화 <레미제라블>과 <건축학개론>은 구조적으로 유사한 결론을 갖고 있다는 공톰점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가난한 집안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승민은 우연찮게 마주한 첫사랑의 설레임을 '안전하게' 추억의 한켠으로 밀어넣고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해 편한 유학길에 오른다. 

<레미제라블>에서 귀족 집안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마리우스는 자신의 의지로 동참했던 혁명이 실패하자 '안전하게' 추억의 한켠으로 밀어넣고 귀족의 신분으로 돌아가 첫눈에 반한 코제트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른다. 

승민에게 첫사랑은 스무살 시절의 자신에게 즐거움과 설레임, 흥분과 괴로움과 좌절이라는 다양한 감정의 다발들을 느끼게 해준 존재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이끈 뮤즈. 이를테면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과 함께 펼쳐지는 풍광의 아름다움.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그 새로운 정취. 그에게 이어폰을 건네준 존재가 바로 첫사랑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마리우스에게 혁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기제이다.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사상을 몸으로 구현하려는 몸부림.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삶,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기에 그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외면한다. 심지어 첫눈에 반한 코제트와 혁명 사이에서도 그는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들은 대상에 끝까지 다가가는 것을 거부한다. 어떤 대상? 어쩌면 그들에게 운명이었을 대상. 그들의 소중한 대상은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박제가 되어 지내든가, 장발장의 생명이 꺼져가기 직전 꿈처럼 펼쳐지는 상상 속에서만 이어질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 '안전하게'.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것이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영화의 선택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왜 영화는 승민이 첫사랑과 헤어지기 직전 함께 잠자리에 드는, 말하자면 첫사랑이란 대상을 더욱 가까이 붙드는, 그러니까 그가 향유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대상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그 장면을 넣는 것을 왜 포기했을까. 또는 이를테면 왜 영화는 마리우스가 결혼 뒤에도 혁명의 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장발장의 죽임이 불러일으킨 상상 속의 혁명을 선택했을까.

만약 이것이 대상을 포기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다고 판단한 영화의 선택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들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영화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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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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