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했을 때 나는 10대의 끝자락에 있었다. 

고3으로 올라가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휴일을 맞아 외출을 했다가 

친구와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았다. 

아마 지금은 없어진, 충장로의 제일극장이었을 거다. 

작은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 나이대가 그렇듯 나 역시 영화를 보며 펑펑 울었다. 

눈 앞이 뿌해져서 영화의 많은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놓칠 지경이었다. 

같이 갔던 친구도 그리 울었는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도 잔잔한 감동이 있는 영화를 떠올릴 때면 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종종 머릿 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몇년 뒤 길에서 우연히 

중고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해 기쁜 마음에 사들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테이프를 트는 일은 없었다. 

그때의 감동이 행여 다칠새라 나는 나중에 테이프를 사놓고도 선반 위에 곱게 놔두고 

쉽사리 꺼내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젯밤 EBS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가 나올 때도 나는 처음에 망설였다. 

더구나 요즘 내 마음 속에는 예전에 가졌던 감수성과 감각들이 조금씩 퇴색되간다는 느낌이 

종종 들면서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지곤 했더랬다. 

그렇게 내가 변해간단 생각 속에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쩐지 

그저 추억의 영화로 가슴 속에 묻어두는 편이 나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리모콘을 손에 내려놓았다. 

15년 전에 느꼈던 감흥이 지금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2013년에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또다른 의미에서 감동이었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면들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이야기보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영화의 리듬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와 심은하가 사진관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을 때, 

카메라는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줌인을 한다. 그건 마치 찰박찰박 얕은 개울물에 

종아리까지 걷어올렸던 바짓단이 조금씩 젖는 것처럼 그렇게 매우 찬찬히 쌓여가는 둘의 

호감의 속도를 따르는 듯했다.


혹은 이를 테면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두 번째로 사진관에 방문해서 영정 사진을 찍을 때 

진행되는 트래킹숏. 한석규가 손에 잡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시점인데, 

트래킹으로 할머니를 향해 전진할 때, 그것은 죽음을 향한 전진이다. 

이렇게 찍기로 결정을 한 순간, 우연히도 촬영감독인 유현목은 그의 유작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래서 죽음을 향해 다가서기로 한 것일까. 

이것은 죽음의 전시효과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그것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쇼트인지 

세르주 다네가 맹렬히 비난했던, <카포>의 트래킹숏과는 상반된 의미에서 

죽음을 향하는 트래킹숏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의 무성영화처럼 대사 없이 진행되는 후반부. 

언젠가 정성일 선생님이 이 점을 지적할 때 나는 그랬었나, 하고 의아해했던 적이 있다. 

영화의 이 후반부는 대사 없이 버틸 수 있을만큼 버텨보겠다며 

영화가 관객과 벌이는 내기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이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98년에는 대중영화에서 이런 실험도 가능했단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날 중요하다. 

투자사 직원이 검열하듯 영화의 편집에 끼어들거나 대중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평가단에게 

설문지를 돌려 재미없다고 지적받은 장면은 여지없이 수정해야 하는 

지금의 영화 제작 시스템 속에서는 특히나.


물론 15년과 같은 종류의 감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말했던가. 

세월이 흘러 다시 본 영화가 똑같은 감동을 주는 건 흘러간 시간동안 내가 자라지 않았거나 

영화가 사기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때의 감수성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젯밤 나를 찾아온 이 영화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또다른 감동을 내게 전해 주었고, 

덤으로 그 시절 추억까지도 살짝 곱씹게 허락해주었다. 

용기를 내서 다시 본 건 다행히 좋은 선택이었다.


... 영화가 남긴 추억 때문인지,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버스 유리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며 지나가는 한석규가 떠오른다. 

덕분에 문득,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문턱으로 퐁당 뛰어들고 싶어지는 

3월 초의 어느 오후.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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