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SBS 예능프로그램 <짝>의 여성 출연자가 녹화 도중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을 다룬 기사의 이상한 어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2014/03/07 - [읽다] - 사람 죽었는데 '대박'?)


이번에는 그 이상한 어법이 등장하는 문장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밀어붙여볼 생각이다.


온라인 기사를 보면 마지막 즈음 거의 언제나 항상 등장하는 문장 (혹은 문단)이 있다.


"누리꾼 (혹은 네티즌들은) ... 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사안에 따라 '...' 부분만 바뀔 뿐 

주어와 술어가 거의 언제나 항상 똑같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식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수학에서 문제에 따라 숫자를 넣으면 정답이 나오는 근의 공식처럼 말이다.


온라인 기사에서 이 문장의 기능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우선은 온라인 기사가 언급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 누리꾼 역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기사화될 가치가 충분함을 스스로 뒷받침한다.

말하자면, 이 내용에 대해 철수도 한마디 보탰고 영희도 한마디 보태고 있으니까 

기사화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다음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내가 읽고 있는 이 기사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기사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철수도 한마디 보탰고 영희도 한마디 보태고 있으니까 

내가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에서 방점은 기사나 독자 모두 자신의 존재-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정당성? 기사가 쓰여지거나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정당성.

이 정당성의 근거는 당연히 누리꾼이라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누리꾼이라는 존재는, 로저 실버스톤 식으로 말하자면, 미디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이웃'과도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사회학에서 일상생활은 나와 너, 우리와 이웃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기반이 된다.

세상에, 나만이 존재하는 사회란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할까? 

이런 점에서 누리꾼의 공식은 온라인 기사가 사회에서 생산-소비될만한 기사임을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누리꾼의 공식'이란 것이 만약 일종의 기만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선, 이 공식에 등장하는 누리꾼의 정체가 모호하다.

누리꾼이 글을 남겼다면 글을 남긴 매체나 사용한 아이디, 하다못해 필명은 있기 마련인데 

온라인 매체 가운데 이런 것들이 명시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는 신문 기사에서 '개포동에 사는 김갑수 씨는 ...라고 말했다'나  

방송 리포트에서 '김갑수 / 서울 개포동'라는 인터뷰 문발을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 하나, 이 공식에 등장하는 누리꾼의 코멘트가 너무나도 피상적이다.

이를테면 '먹방'을 보고서는 '맛있게 먹는다', '셀카' 사진을 보고서는 '예쁘다'는 식이다.

앞 게시물에서 언급했던 '대박'은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쓰일 정도로 상투적인 표현으로 자리매김 했다.

누가 말했는지도 모르는데다 너무나도 상투적인 표현들이어서 (그럴리는 없겠지만) 지어낸 느낌마저 든다.

    

이것은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미리 녹음된 웃음소리를 틀어주는 것과 똑같은 효과 아닌가?

녹음된 웃음소리는 방청석의 리액션 쇼트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누가 웃었는지도 모를 뿐더러

그것이 녹음된 웃음소리인지 아닌지 시청자인 우리들은 직감적으로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영혼없는 웃음인 것도 잘 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지적했듯이, 

녹음된 웃음소리의 진정한 기능은 웃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대신해준다는 데 있다. 

이런 기능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본 프로그램이 '객관적으로'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전혀 웃지도 않더라도 말이다.[각주:1]


마찬가지로 누리꾼의 공식은 누가 말했는지 정체가 모호할 뿐더러, 피상적인 표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기사와 읽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른 사람과 정서를 공유한다는 느낌, 

그래서 쓰거나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라는 느낌을 나누게 한다.

실제로 그 기사가 그런 가치가 있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누리꾼의 공식이라는 문장의 역할이다.


진정한 이웃이라기 보다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서의 누리꾼,

말하자면 텅 빈 공백과도 같은 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이상한 효과. 

만약 허락된다면 나는 이 문장을 '유령의 문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1.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년, 71~72쪽. [본문으로]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 죽었는데 '대박'?  (1) 2014.03.07
<긍정의 배신>, 긍정의 이데올로기  (0) 2012.01.08

WRITTEN BY
양일혁

,

SBS 예능 프로그램 <짝>의 여성 출연자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방송 사상 녹화 도중 출연자가 숨지는 일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소식은 언제나 그렇듯 묵직한 돌멩이가 가슴을 뻥 뚫고 사라지는 느낌을 던진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의 사고는 잠시 동안 활동을 정지하고 판단은 작동 불가 상태가 되어버린다.

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과연 내가 두 발을 붙이고 있는 대지 위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 것인가.

아니, 혹은 어쩌면 이것은 내 꿈이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는 아닐까.



직접 겪거나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면, 

보통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매개체는 기사가 거의 유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런 끔찍한 소식을 활자로 직접 읽어야 하는 우리들을 조금이나마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사는 매우 신중히 쓰여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스포츠서울닷컴이 3월 5일 오전 11시 50분에 송고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짝 출연자 사망 소식에 누리꾼들은 "짝 출연자 사망, 정말 안타깝다", "짝 출연자 사망, 이게 무슨 일이지?", 

"짝 출연자 사망, 대박이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비슷비슷한 시각에 올라온 디지털타임즈매일경제 기사에도 비슷비슷한 내용의 문장이 있다.

다른 매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에 띄는 건 '대박'이란 단어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대박은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

보통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둘 때 쓰인다.


하지만 이상하다. 


사람이 숨진 일이 '기대 이상의 성공'인가?

'크게 이루어진 어떤 일'인가?


대박이란 말이 요즘에는 감탄사처럼 아무 때나 쓰인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런 쓰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기사라는 글쓰기 형식이 

마냥 유행어를 좇아가며 친구와 잡담하듯 쓰는 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온라인을 주로 이용하는 젊은 세대의 풍속에 어느 정도 발맞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대박이란 단어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놓기에는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가벼워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표현 아닐까. 

이 일과 관련해 누리꾼들이 정말로 온라인에서 대박이라고 외친다고 해도

다른 단어를 고를 수는 없었을까.

기사를 읽는 우리와 고인의 지인, 그리고 무엇보다(!) 고인을 아주 조금이나마 위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 논의가 저널리즘의 도덕론, 혹은 윤리학에 그친다면 매우 따분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온라인 기사의 어떤 이상한 형식이다.

기사의 마지막에 거의 어김없이 등장하는 누리꾼이라는 정체불명의 정체.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번 글에서 이어질 것이다.



WRITTEN BY
양일혁

,


<긍정의 배신> / 바버라 애런라이크 / 부키 /  2011년 4월


보지 않은 책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때가 있다. 
<긍정의 배신>도 그런 경우였다.
문화부 출판 담당 기자 앞으로 온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오! 당신들의 나라>를 들춰보고선
이 저자가 <긍정의 배신>을 쓴 걸 알게 됐고, 
나도 모르게 '아, 그 책!' 하고 가볍게 외쳤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될 때가 있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는, 
혹은 이미 알고 있어서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의 세계란 어쩐지 그런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쯤 뒤. 
나는 방황하듯 서점을 돌아다녔고, 
의도치 않게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긍정의 배신.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오늘날 서점가를 유령처럼 휩쓸고 있는 자기계발서와 
(결국 자기계발서의 또 다른 판본인) 심리학 서적이 찬양하는 정서.
혹은, 오늘날 시장과 이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노력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갖춰야 하는 에티튜드라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바로 그 무드.
'간절히 바라면 이룰 수 있다'는 마법과도 같은 정언명령. 
그냥 그건 한 마디로 사기다.






왜 그럴까. 
<긍정의 배신>은 여기에 대해 말한다.

미국인은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고정관념에 따르면 미국인은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이고, 천박하다.
그런데 최근 행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각 나라 사람들의 상대적 행복도를 측정해 봤는데 결과는 이상했다. 
그다지 행복한 축에 끼지 못한 것이다. 경제가 한창 잘 나갈때 조차.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23위 정도였다.
네덜란드인, 덴마크인, 말레이시아인, 핀란드인보다 낮았다.
2006년 영국 신경제재단이 측정한 행복지수에서는 150위 였다.
심지어 세계 우울증 치료제의 2/3는 미국에서 소비된다.

그런데도 왜 미국인들은 긍정적인가? 혹은 긍정적으로 보이는가?
'긍정적 사고'라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노력을 해야 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생각은 낙천적인 감정을 낳고,
한발 더 나가 실제로 행복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중요하다.
이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다.
저절로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긍정적 사고가 올바른 것이어서 우주가 행복과 충만함으로 향하고 있다면
굳이 긍정적 사고 훈련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미국인들이 원래부터 긍정적 사고를 예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 미국을 사로잡은 정서는 칼뱅주의였다.
칼뱅주의는 무엇보다도 엄격한 자기 규율과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다.
만족을 뒤로 하고 향락의 유혹에 저항해 열심히 부를 쌓으라는 가르침.
그리고 이 윤리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
이 둘의 관계에 관한 고전이 바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런데 미국은 건국 과정에서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미국의 예외주의와 연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행위는
끊임없는 자기 통제와 규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칼뱅주의와 일치한다.
아니, 칼뱅주의의 또 다른 판본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다른 말로 소비자 자본주의는 
긍정적 사고와 훨씬 죽이 잘 맞았다.
소비자 문화는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부추기고,
긍정적 사고는 소비자들에게 '당신은 더 많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고,
정말로 원하고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면 실제로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반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것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성공이란 필연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하는 것이다.

긍정적 사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경제의 과잉을 변명하고 잘못을 덮어주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를 장려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경영 코치', '라이프 코치'가 그 예다.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은 기업이다.
피고용인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그들은
"긍정적 사고를 가지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냐"며
긍정적 사고를 하라고 교육받는다.
이 교육으로 효과를 얻는 쪽은 피고용인들이 전혀 아니다.
실질적인 효과는 회사(와 기업에게서 돈을 받는 강사)가 얻는다.
내가 해고되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이고,
정리해고 뒤 남은 이들은 교육을 통해 일종의 결속력을 얻게 된다.

긍정적 사고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의료, 종교, 학계에도 퍼져 있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를 챕터별로 나눠 경험담과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 한다.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령의 문장, 혹은 누리꾼이라는 이상한 주어  (0) 2014.03.10
사람 죽었는데 '대박'?  (1) 2014.03.07

WRITTEN BY
양일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