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바버라 애런라이크 / 부키 /  2011년 4월


보지 않은 책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때가 있다. 
<긍정의 배신>도 그런 경우였다.
문화부 출판 담당 기자 앞으로 온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오! 당신들의 나라>를 들춰보고선
이 저자가 <긍정의 배신>을 쓴 걸 알게 됐고, 
나도 모르게 '아, 그 책!' 하고 가볍게 외쳤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될 때가 있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는, 
혹은 이미 알고 있어서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의 세계란 어쩐지 그런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쯤 뒤. 
나는 방황하듯 서점을 돌아다녔고, 
의도치 않게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긍정의 배신.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오늘날 서점가를 유령처럼 휩쓸고 있는 자기계발서와 
(결국 자기계발서의 또 다른 판본인) 심리학 서적이 찬양하는 정서.
혹은, 오늘날 시장과 이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노력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갖춰야 하는 에티튜드라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바로 그 무드.
'간절히 바라면 이룰 수 있다'는 마법과도 같은 정언명령. 
그냥 그건 한 마디로 사기다.






왜 그럴까. 
<긍정의 배신>은 여기에 대해 말한다.

미국인은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고정관념에 따르면 미국인은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이고, 천박하다.
그런데 최근 행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각 나라 사람들의 상대적 행복도를 측정해 봤는데 결과는 이상했다. 
그다지 행복한 축에 끼지 못한 것이다. 경제가 한창 잘 나갈때 조차.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23위 정도였다.
네덜란드인, 덴마크인, 말레이시아인, 핀란드인보다 낮았다.
2006년 영국 신경제재단이 측정한 행복지수에서는 150위 였다.
심지어 세계 우울증 치료제의 2/3는 미국에서 소비된다.

그런데도 왜 미국인들은 긍정적인가? 혹은 긍정적으로 보이는가?
'긍정적 사고'라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노력을 해야 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생각은 낙천적인 감정을 낳고,
한발 더 나가 실제로 행복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중요하다.
이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다.
저절로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긍정적 사고가 올바른 것이어서 우주가 행복과 충만함으로 향하고 있다면
굳이 긍정적 사고 훈련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미국인들이 원래부터 긍정적 사고를 예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 미국을 사로잡은 정서는 칼뱅주의였다.
칼뱅주의는 무엇보다도 엄격한 자기 규율과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다.
만족을 뒤로 하고 향락의 유혹에 저항해 열심히 부를 쌓으라는 가르침.
그리고 이 윤리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
이 둘의 관계에 관한 고전이 바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런데 미국은 건국 과정에서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미국의 예외주의와 연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행위는
끊임없는 자기 통제와 규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칼뱅주의와 일치한다.
아니, 칼뱅주의의 또 다른 판본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다른 말로 소비자 자본주의는 
긍정적 사고와 훨씬 죽이 잘 맞았다.
소비자 문화는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부추기고,
긍정적 사고는 소비자들에게 '당신은 더 많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고,
정말로 원하고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면 실제로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반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것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성공이란 필연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하는 것이다.

긍정적 사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경제의 과잉을 변명하고 잘못을 덮어주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를 장려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경영 코치', '라이프 코치'가 그 예다.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은 기업이다.
피고용인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그들은
"긍정적 사고를 가지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냐"며
긍정적 사고를 하라고 교육받는다.
이 교육으로 효과를 얻는 쪽은 피고용인들이 전혀 아니다.
실질적인 효과는 회사(와 기업에게서 돈을 받는 강사)가 얻는다.
내가 해고되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이고,
정리해고 뒤 남은 이들은 교육을 통해 일종의 결속력을 얻게 된다.

긍정적 사고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의료, 종교, 학계에도 퍼져 있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를 챕터별로 나눠 경험담과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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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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