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페이스북에 쓴 글을 여기 옮겨놓습니다.

기록을 위해 날짜 부분은 방영 날짜로 정정 표기했습니다.





세월호 사고는 참사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고 이전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곳곳의 한심한 민낯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언론입니다.
'기레기'라는 말이 이처럼 널리 퍼진 적이 있던가요.
세월호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사건의 치밀한 재구성,
해운업체의 비리와 그에 따른 음모론,
정부의 무능한 대응...
다 좋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 보도부터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부터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엄청난 재난을 누구보다 신속히 보도한 점은 높이 살 만 합니다.
하지만 오보와 우왕좌왕하는 모습,
그리고 (언론 전체에 해당되는) 현장에서의 과열된 취재 경쟁은 
시청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그들의 슬픔과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기자들 역시, 그들에 비견할 바는 물론 아니겠지만, 
그래도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과 윤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말 못할 심정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한 제목은 이것입니다.
'봄꽃이 지는데 우린 무얼했나'

4월 26일 토요일 이미 두 차례 방영됐고,
27일 일요일 새벽 4시 반, 오후 1시 반에 방영됩니다.






WRITTEN BY
양일혁

,

영화에 관한 유명한 격언. 

한 편의 영화를 천 명이 보면 그 영화는 곧 천 개의 영화가 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마음 속에 전혀 다른 영화로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뇌의 프로세스가 다른 누군가와 똑같이 작동하는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 각자의 영화관, 혹은 리좀으로서의 영화.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마음 속에는 

영화사적 이유나 미학적인 이유와는 거리가 멀고,

정치적인 이유와는 더더군다나 관계가 없는,

다른 이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아니, 남들이 공감을 하건 말건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오직 나만의 이유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나만의 이유라는 것. 

그것은 취향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사소해 보이고

운명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거창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결국 내 삶과 이어진 어떤 끈 같은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올해 본 영화 가운데 <용의자>가 그렇다.

원신연의 네 번째 개봉작인 <용의자>는 

가족을 잃고 남한으로 넘어온 북한의 전직 특수요원이 

국정원에게서 누명을 쓰고 대기업 회장을 죽인 용의자로 몰린 가운데 

복수와 진실을 위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린 영화이다.



용의자 (2013)

The Suspect 
7.8
감독
원신연
출연
공유, 박희순, 조성하, 유다인, 조재윤
정보
액션, 드라마 | 한국 | 137 분 | 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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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아득해질만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말하자면 리비도가 충만한 것이 미덕인 영화이다.

하지만 이 리비도를 지탱하는 운동의 방식이 

이미 10년도 더 전에 세상에 등장한 <본 아이덴티티>를 시작으로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본 시리즈에서 

이미 매우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취가 곧 한계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장면이다.


주의. 

이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은 없다.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미안할 따름이다.



영화가 클라이막스로 치다르기 직전, 

살인 용의자로 몰린 주인공 지동철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한강으로 뛰어든 뒤 자취를 감춘다.

주 기자는 소나기처럼 퍼붓는 경찰의 총알 세례에도 유유히 지동철이 사라진 바로 그 현장에서 

중계를 탄다. 그런데...


"경찰은 정보기관과도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검문검색을 강화해 살인 용의자 지동철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만다.

선배 기자(였지만 관련 음모를 파헤치다 해직당한) 최경희로부터 살인 사건의 배후를 밝힐테니 

중요한 자료를 갖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개고생하기 싫어서 적당히 뭉개고 있던 상황이다.  



주 기자를 열심히 화면에 담고 있던 중계 카메라맨도 낌새를 눈치채고 

'너 대가리에 총맞았냐'는 표정을 지어보지만 

그게 뭐 대수냐는 듯 그는 쓴웃음만 짓는다. 그리고는...



"내가 불알 달고 태어나서 쪽팔리게 씨발!"이라고 외치며

마이크를 한강 다리 난간에 부서져라 내리친 뒤 온 힘을 다해 허공으로 던져버린다.



그의 이런 결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간단하다. 

지동철이 살인 용의자라는 팩트가 그릇됐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경찰이나 국정원을 통해 흘러나왔을) 그 그릇된 팩트를 

앵무새처럼 나불거리는 자기 자신이 기자로서 쪽팔렸던 것이다. 


기자가 중계 도중 말을 멈추는 것은 대형 방송 사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을 멈춘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마이크를 내리꽂고 냅다 던져버린다.

더군다나 그 마이크에는 YTN이라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달려있다.

다시 한 번 반복.

이 영화에서 그는 YTN 기자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왜 내 심금을 울리는가.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비록 영화 속이지만, 그는 나의 동료이다.

더군다나 그 장면에는 나와 내 주변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해야 할 보도를 하지 못하거나 (기자협회보, 국정원 회오리 휩쓸린 YTN)

언급해야 할 대상을 언급하지 못하는 (미디어스, "박근혜 대통령은 YTN의 성역입니까?")

무슨 음모론에서나 나옴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마이크를 내던지는 이 장면은 

동료들 가운데 아직 아무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는 품었음직한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러니 어찌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은 내 말에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런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영화와 엮는 것은 유치한 놀음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대꾸할 생각이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어쨌든 그 안에서 내 삶의 단편을 보았다고.




WRITTEN BY
양일혁

,

앞서 SBS 예능프로그램 <짝>의 여성 출연자가 녹화 도중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을 다룬 기사의 이상한 어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2014/03/07 - [읽다] - 사람 죽었는데 '대박'?)


이번에는 그 이상한 어법이 등장하는 문장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밀어붙여볼 생각이다.


온라인 기사를 보면 마지막 즈음 거의 언제나 항상 등장하는 문장 (혹은 문단)이 있다.


"누리꾼 (혹은 네티즌들은) ... 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사안에 따라 '...' 부분만 바뀔 뿐 

주어와 술어가 거의 언제나 항상 똑같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식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수학에서 문제에 따라 숫자를 넣으면 정답이 나오는 근의 공식처럼 말이다.


온라인 기사에서 이 문장의 기능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우선은 온라인 기사가 언급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 누리꾼 역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기사화될 가치가 충분함을 스스로 뒷받침한다.

말하자면, 이 내용에 대해 철수도 한마디 보탰고 영희도 한마디 보태고 있으니까 

기사화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다음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내가 읽고 있는 이 기사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기사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철수도 한마디 보탰고 영희도 한마디 보태고 있으니까 

내가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에서 방점은 기사나 독자 모두 자신의 존재-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정당성? 기사가 쓰여지거나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정당성.

이 정당성의 근거는 당연히 누리꾼이라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누리꾼이라는 존재는, 로저 실버스톤 식으로 말하자면, 미디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이웃'과도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사회학에서 일상생활은 나와 너, 우리와 이웃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기반이 된다.

세상에, 나만이 존재하는 사회란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할까? 

이런 점에서 누리꾼의 공식은 온라인 기사가 사회에서 생산-소비될만한 기사임을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누리꾼의 공식'이란 것이 만약 일종의 기만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선, 이 공식에 등장하는 누리꾼의 정체가 모호하다.

누리꾼이 글을 남겼다면 글을 남긴 매체나 사용한 아이디, 하다못해 필명은 있기 마련인데 

온라인 매체 가운데 이런 것들이 명시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는 신문 기사에서 '개포동에 사는 김갑수 씨는 ...라고 말했다'나  

방송 리포트에서 '김갑수 / 서울 개포동'라는 인터뷰 문발을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 하나, 이 공식에 등장하는 누리꾼의 코멘트가 너무나도 피상적이다.

이를테면 '먹방'을 보고서는 '맛있게 먹는다', '셀카' 사진을 보고서는 '예쁘다'는 식이다.

앞 게시물에서 언급했던 '대박'은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쓰일 정도로 상투적인 표현으로 자리매김 했다.

누가 말했는지도 모르는데다 너무나도 상투적인 표현들이어서 (그럴리는 없겠지만) 지어낸 느낌마저 든다.

    

이것은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미리 녹음된 웃음소리를 틀어주는 것과 똑같은 효과 아닌가?

녹음된 웃음소리는 방청석의 리액션 쇼트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누가 웃었는지도 모를 뿐더러

그것이 녹음된 웃음소리인지 아닌지 시청자인 우리들은 직감적으로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영혼없는 웃음인 것도 잘 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지적했듯이, 

녹음된 웃음소리의 진정한 기능은 웃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대신해준다는 데 있다. 

이런 기능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본 프로그램이 '객관적으로'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전혀 웃지도 않더라도 말이다.[각주:1]


마찬가지로 누리꾼의 공식은 누가 말했는지 정체가 모호할 뿐더러, 피상적인 표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기사와 읽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른 사람과 정서를 공유한다는 느낌, 

그래서 쓰거나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라는 느낌을 나누게 한다.

실제로 그 기사가 그런 가치가 있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누리꾼의 공식이라는 문장의 역할이다.


진정한 이웃이라기 보다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서의 누리꾼,

말하자면 텅 빈 공백과도 같은 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이상한 효과. 

만약 허락된다면 나는 이 문장을 '유령의 문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1.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년, 71~7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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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일혁

,

SBS 예능 프로그램 <짝>의 여성 출연자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방송 사상 녹화 도중 출연자가 숨지는 일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소식은 언제나 그렇듯 묵직한 돌멩이가 가슴을 뻥 뚫고 사라지는 느낌을 던진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의 사고는 잠시 동안 활동을 정지하고 판단은 작동 불가 상태가 되어버린다.

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과연 내가 두 발을 붙이고 있는 대지 위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 것인가.

아니, 혹은 어쩌면 이것은 내 꿈이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는 아닐까.



직접 겪거나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면, 

보통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매개체는 기사가 거의 유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런 끔찍한 소식을 활자로 직접 읽어야 하는 우리들을 조금이나마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사는 매우 신중히 쓰여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스포츠서울닷컴이 3월 5일 오전 11시 50분에 송고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짝 출연자 사망 소식에 누리꾼들은 "짝 출연자 사망, 정말 안타깝다", "짝 출연자 사망, 이게 무슨 일이지?", 

"짝 출연자 사망, 대박이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비슷비슷한 시각에 올라온 디지털타임즈매일경제 기사에도 비슷비슷한 내용의 문장이 있다.

다른 매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에 띄는 건 '대박'이란 단어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대박은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

보통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둘 때 쓰인다.


하지만 이상하다. 


사람이 숨진 일이 '기대 이상의 성공'인가?

'크게 이루어진 어떤 일'인가?


대박이란 말이 요즘에는 감탄사처럼 아무 때나 쓰인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런 쓰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기사라는 글쓰기 형식이 

마냥 유행어를 좇아가며 친구와 잡담하듯 쓰는 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온라인을 주로 이용하는 젊은 세대의 풍속에 어느 정도 발맞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대박이란 단어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놓기에는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가벼워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표현 아닐까. 

이 일과 관련해 누리꾼들이 정말로 온라인에서 대박이라고 외친다고 해도

다른 단어를 고를 수는 없었을까.

기사를 읽는 우리와 고인의 지인, 그리고 무엇보다(!) 고인을 아주 조금이나마 위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 논의가 저널리즘의 도덕론, 혹은 윤리학에 그친다면 매우 따분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온라인 기사의 어떤 이상한 형식이다.

기사의 마지막에 거의 어김없이 등장하는 누리꾼이라는 정체불명의 정체.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번 글에서 이어질 것이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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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YTN (새 SB)

겪다 2014. 3. 4. 18:00

● YTN 새 SB 공개


4월 7일 상암동 이전을 앞두고 

YTN이 새로운 SB (Station Break)를 공개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콘텐츠 TF팀에서 제작을 담당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개봉한 한국 영화 가운데 

YTN 로고나 YTN 앵커, 기자가 출연한 10여 편을 골라 편집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방송사 가운데 YTN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에 착안해 

'영화에서도 뉴스는 역시 YTN'이란 주제로 제작했습니다.







● “내가 YTN을 출연시킨 이유는...” 


편집 회의 중에 

"YTN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감독들의 코멘트를 넣으면 훨씬 설득력이 있겠다"는 의견이 나와

세 감독으로부터 코멘트를 받았습니다.

SB에서는 분량상 간략하게 담았지만 여기선 더 길게 담아볼까 합니다.



연가시 같은 재난 영화는 현실감, 사실감이 생명입니다.

상황을 알리는 방송 매체를 SBC,MBS처럼 정체불명의 로고로 처리하는 건 

현실감도 없고, 궁색한 일이죠. 

그런 면에서 YTN은 24시간 동안 실시간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매체라는 공신력이 있는 데다가,

실제 앵커 분들이 직접 출연하셔서 뉴스를 전달해주니, 영화 속 상황들이 사실인 것 같은 

착각을 하도록 하는 효과 덕에 몰입도에 지대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박정우, <연가시> 감독 -  



Q: <용의자>에서는 YTN 보도 장면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YTN 기자로도 나오고 있는데요,

    다른 채널이나 가상의 채널이 아니라 YTN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지요?

 

A: YTN은 공중파를 뛰어 넘는 전국민 뉴스 채널입니다. 

    살아 있는 뉴스, 깨어 있는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어처럼 전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있죠.

    사건 사고가 일어 났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채널이 YTN 이고, 

    가장 빠른 보도를 통해 현장의 상황을 전해주는 채널이 또한 YTN 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YTN을 선택한 당연한 이유입니다.

 

Q. YTN 로고를 노출하거나 YTN 기자 역할을 맡은 등장인물이 사건을 보도하는 장면을 

    연출하실 때 기대하신 효과는 무엇이었는지요?

 

A: 실제감입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눈 앞에서 보여지는 상황들이 

    허구가 아닌 실제에 가까운 상황이라고 느끼길 바랬던겁니다.

    효과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YTN의 로고와 YTN기자 설정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영화에 더 많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 모든것이 YTN의 국민적 신뢰로 인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 원신연, <용의자> 감독 -



영화 속에 등장하는 뉴스 방송 장면의 경우 주로 가상 채널이 많이 사용 되는데 

그 이유는 방송장면의 내용이 대부분 반 사회적 범죄를 다루는 것이기에

기존의 방송사들이 자신의 방송사 이미지를 염려해서 영화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선 잘 모르는 가상 채널에서 뉴스 보도 내용이 나오면 

현실성 반영의 허구성이 느껴져 몰입을 방해하는 불편함이 작용한다. 

 

그래서 감독들은 뉴스보도 내용에 관해선 24시간 뉴스 전문 채널인 YTN을 선호하는 편이다.


                                                                                                            - 이준익, <소원> 감독 -




● 영화 장면을 쓰는 문제


영화 영상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할까요?


방송 뉴스에서는 영화 속 장면 사용이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뉴스가 '공익성'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SB 제작은 뉴스가 아니기에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습니다.

이럴 때 법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두 가지, '저작권'과 '초상권'입니다.


저작권은 콘텐츠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배급사가 모두 갖고 있거나 배급사와 제작사가 공동으로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배급사와 제작사 두 군데에 연락을 해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초상권은 영상 속 등장인물의 얼굴에 대한 권리입니다.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도 배우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해당 영상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WRITTEN BY
양일혁

,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했을 때 나는 10대의 끝자락에 있었다. 

고3으로 올라가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휴일을 맞아 외출을 했다가 

친구와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았다. 

아마 지금은 없어진, 충장로의 제일극장이었을 거다. 

작은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 나이대가 그렇듯 나 역시 영화를 보며 펑펑 울었다. 

눈 앞이 뿌해져서 영화의 많은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놓칠 지경이었다. 

같이 갔던 친구도 그리 울었는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도 잔잔한 감동이 있는 영화를 떠올릴 때면 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종종 머릿 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몇년 뒤 길에서 우연히 

중고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해 기쁜 마음에 사들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테이프를 트는 일은 없었다. 

그때의 감동이 행여 다칠새라 나는 나중에 테이프를 사놓고도 선반 위에 곱게 놔두고 

쉽사리 꺼내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젯밤 EBS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가 나올 때도 나는 처음에 망설였다. 

더구나 요즘 내 마음 속에는 예전에 가졌던 감수성과 감각들이 조금씩 퇴색되간다는 느낌이 

종종 들면서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지곤 했더랬다. 

그렇게 내가 변해간단 생각 속에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쩐지 

그저 추억의 영화로 가슴 속에 묻어두는 편이 나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리모콘을 손에 내려놓았다. 

15년 전에 느꼈던 감흥이 지금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2013년에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또다른 의미에서 감동이었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면들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이야기보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영화의 리듬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와 심은하가 사진관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을 때, 

카메라는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줌인을 한다. 그건 마치 찰박찰박 얕은 개울물에 

종아리까지 걷어올렸던 바짓단이 조금씩 젖는 것처럼 그렇게 매우 찬찬히 쌓여가는 둘의 

호감의 속도를 따르는 듯했다.


혹은 이를 테면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두 번째로 사진관에 방문해서 영정 사진을 찍을 때 

진행되는 트래킹숏. 한석규가 손에 잡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시점인데, 

트래킹으로 할머니를 향해 전진할 때, 그것은 죽음을 향한 전진이다. 

이렇게 찍기로 결정을 한 순간, 우연히도 촬영감독인 유현목은 그의 유작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래서 죽음을 향해 다가서기로 한 것일까. 

이것은 죽음의 전시효과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그것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쇼트인지 

세르주 다네가 맹렬히 비난했던, <카포>의 트래킹숏과는 상반된 의미에서 

죽음을 향하는 트래킹숏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의 무성영화처럼 대사 없이 진행되는 후반부. 

언젠가 정성일 선생님이 이 점을 지적할 때 나는 그랬었나, 하고 의아해했던 적이 있다. 

영화의 이 후반부는 대사 없이 버틸 수 있을만큼 버텨보겠다며 

영화가 관객과 벌이는 내기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이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98년에는 대중영화에서 이런 실험도 가능했단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날 중요하다. 

투자사 직원이 검열하듯 영화의 편집에 끼어들거나 대중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평가단에게 

설문지를 돌려 재미없다고 지적받은 장면은 여지없이 수정해야 하는 

지금의 영화 제작 시스템 속에서는 특히나.


물론 15년과 같은 종류의 감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말했던가. 

세월이 흘러 다시 본 영화가 똑같은 감동을 주는 건 흘러간 시간동안 내가 자라지 않았거나 

영화가 사기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때의 감수성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젯밤 나를 찾아온 이 영화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또다른 감동을 내게 전해 주었고, 

덤으로 그 시절 추억까지도 살짝 곱씹게 허락해주었다. 

용기를 내서 다시 본 건 다행히 좋은 선택이었다.


... 영화가 남긴 추억 때문인지,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버스 유리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며 지나가는 한석규가 떠오른다. 

덕분에 문득,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문턱으로 퐁당 뛰어들고 싶어지는 

3월 초의 어느 오후.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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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간 경찰...학교폭력 뿌리 뽑히나?

(제목을 누르면 해당 뉴스로 연결돼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을 전담하는 경찰관을 만나보았다.

미국식으로 말하면 스쿨 폴리스다.

팔에 달린 독수리마크 앰블럼도 새로 달아넣었다.

원래 그렇게 근무하는지, 아니면 카메라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명함까지 건네며 힘든일 있으면 카톡으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 나는 제복 입은 경찰이 학교 복도를 어슬렁거리면 학생들이 겁내고 위화감을 느낄 줄 알았다.


기우였다.

학생들은 신기한 구경거리가 눈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하며 계속 경찰과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경찰이 학교를 돌아다니는 걸 학생들은 어떻게 느낄까.

"별 효과 없을 거 같아요."

조금 냉소적인 학생들은 뜸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와도 도덕적인 뻔한 얘기만 하고."


그래도 순찰을 돌면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지 않니?

"하루종일 있으면 그렇겠죠. 

잠깐 왔다가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조금 영리한 학생은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때리는 얘들은 멀리서 경찰 나타나면 금방 낌새 알아채고 숨죽이고 있어요.

경찰은 적발 못해요."


약간 계산적인 학생은 이런 견해도 내놓았다.

"요즘엔 학교폭력 잘 없어요."

오, 금시초문인데. 왜 그렇지. 미디어가 뻥튀기한 건가.

"맞으면 돈이거든요."


학교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너, 참 기특하다.

학교폭력이 점점 사라지는 풍토라면 그건 분명 긍정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값 벌 수 있으니 쳐맞는 게 두렵지 않는 세상.

주먹의 논리를 깨부수는 것이 돈의 논리라니 그건 조금 많이 씁쓸하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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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은 누구일까

쓰다 2013. 2. 28. 14:15

우리 회사 후문 골목에는 조그만 편의점이 하나 있다. 

협소한 곳이지만 회사들이 몰려 있는데다 

주인 아저씨 성격까지 싹싹해 직장인들의 숨통 역할을 해주곤 했다.

담배나 간식 따위를 사며 잠시 바깥 공기를 쐬긴 제격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 후문 바로 앞에 건물이 세워지더니 

1층에 새로운 편의점이 들어왔다. 

그것도 기존에 있던 편의점보다 네 배쯤은 큰 크기로.



테이블과 의자까지 번듯하게 갖춰져 있어 그곳은 곧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떠올랐다.

직장인들로 늘 북적였고, 

삼각김밥 같은 물건은 점심시간 무렵이 되면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예전의 그 조그만 편의점은 텅텅 비게 되었다.

나름 단골 편의점을 이용하겠다는 나의 결심 조차 언젠가부터 조금씩 무뎌지더니

이제는 습관처럼 새로 생긴 큰 편의점으로 가게 되었다.



예전의 작은 편의점 사장은 애써 내색은 안하려는 눈치였지만 

팍 줄어든 매출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자, 우리가 보아오던 영화나 만화의 장르적인 관습에 따르자면 

새로 생긴 그 큰 편의점은 악당이어야 한다.

자본의 힘을 등에 업고 규모의 경제를 밀어붙이는 악당.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악당과 싸우고 

작은 가게를 구해내 공동체의 선을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컨벤션일 뿐. 

컨벤션은 이미 익숙한 구조를 따르기 때문에 즐기는 데 고민이 필요없다.

그것이 컨벤션의 최고의 장점이다.



현실은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새로 생긴 큰 편의점 주인 부부 역시 

무척이나 친절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는 점이다.



안타깝지만 이 현실 세계에서 악당이란 건 성립되지 않는다.

선한 이웃만 있을 뿐.

그들은 다만 자기가 지니고 있는 총알을 밑천 삼아 먹고 살기 위해 일할 뿐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면 (신의 뜻에 따라) 성공할 거라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윤리를 

각자의 방식대로 열심히 실천하는 중이지만 

문제는 그 노력들이 이웃끼리 경쟁의 톱니바퀴가 되어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누군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나의 반문.

왜 선한 이웃들이 열심히 사는데 누구는 웃고 누구는 울어야 할까.

이런 세상은 공정한가. 

나의 대답. 

아니오.

이런 결과라면 그런 결과를 낳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악당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진정한 악당이란 바로 이런 결과를 낳는 원인이란 녀석이 아닐까. 

그렇게 치자면 우리는 한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참으로 거대한 녀석과 상대해야 하는 셈이다.

즐거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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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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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문화면이 대부분 할리우드에 간 김지운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는 가운데 드물게 왕자웨이에 관한 기사도 실렸다. 

기사를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엔 세가지가 없다. 스턴트맨, 와이어액션, CG. 그런 것들을 쓴다면 쿵후 영화일 뿐이다." 


행간으로 미뤄보건데 왕자웨이가 찍고 싶은 건 쿵후가 아니라 무협이었나 보다. 

10년 전 와호장룡이 사람들 눈을 홀리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 


허우 샤오시엔은 단칼에 그 영화는 사기라고 말했다.

씬에서 보여지는 중력의 세계가 서로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중국과 홍콩, 대만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각각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 


지아 장커와 왕자웨이, 허우 샤오시엔이 모두 무협 영화를 준비중이란 소식이 들렸다.

나는 그들이 찍은 무협 영화를 보고 싶어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거의 10년이나 지나서야 왕자웨이가 무협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변을 흐르는 시간이란 중력의 무게를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했다.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복기해보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는


키스와 타르트의 달콤한 모습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까 내기라도 하듯 그 둘이 중첩되는 모습을 반복했고,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서는 스텝 프린팅으로 영화 속도의 표준을 거슬러가려 했으며,

<2046>에서는 (아마도) 문화혁명 시기 홍콩과 80년 뒤인 2046년의 SF 사이를 시침 뚝 떼고 오고갔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스턴트맨과 와이어과 CG 없이 액션을 찍었다.

이번에도 영화 환경을 둘러싼 시간이란 중력의 무게를 다시 한번 거스른 것이다.

그의 영화 속 중력의 세계는 어떤걸까.



베를린영화제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한 기자는 물었다. 

(링크된 페이지에서 맨 처음 올라온 동영상을 찾아보면 나온다.)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해한대로 번역해보면) 왕자웨이는 (이렇게) 답했다.




"제게 가장 큰 도전은 전 무예를 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제가 무예 팬이어서 쇼나 소설이나 영화를 보긴 했는데


이번 여정에서 저는 직접 해본 적 없단 사실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사람들은 무예를 폭력이나 무력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3년 동안 나이든 무예의 대가들을 만나면서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실 매우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쿵후가 스포츠 아니면 건강이나 챙기는 요가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쿵후는 사람 목숨을 뺏거나 지키는 무기입니다. 


제가 만나본 고수들은 모두 겸손하고 점잖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 손에 무기가 있단 사실을 매우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 한 어린 소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문을 통해 교실 속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건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동시에 영화 감독으로서 저 일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막 시작하는 저 자신 말이죠.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난 뒤의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 여정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다양한 층들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 시간을 더 쏟고 싶었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무예에 대한 배움에 시간을 더 쏟고 싶길 소망했다는 왕자웨이.


그가 이번에 주조한 시간의 중력은 어떤 쾌감을 불러일으킬지, 


두근거리며 기다려 본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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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본 광고이다. 

상단에는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못 하는 이유는 홍길동의 [ ]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유가 설명되어야 할 곳을 괄호로 처리한 것은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곧 알게 된다. 

중앙과 왼쪽에는 럭셔리해 보이는 3명의 남자가 활짝 웃고 있다. 큰 눈, 오똑한 코, 갸름한 턱을 지니고 있다. 

캐리커쳐의 세계에서 이는 전형적으로 잘생긴 외모를 지칭하는 기호들이다. 

여기에다 어디서 흘러나오는 빛인지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한다.

반면, 조금 구석으로 치우친듯한 중앙 오른쪽에는 홍길동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다. 

한 마디로 못생겼다. 

튀어나온 광대뼈, 각진턱, 작은 눈은 캐리커쳐의 세계에서 전형적으로 못생긴 얼굴을 상징하는 기호이다. 

마침 두 볼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이는 서자 출신이라 호형호제라고 부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억울함일 수도 있고, 

형과 아우와 달리 초라한 자신의 외모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둘 다 일수도 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광고인지는 그림만 봐도 대충 감이 오지만 맨 아래를 보면 확실하게 정체가 밝혀진다. 

(이런 저런 시비에 얽히고 싶지 않아 일부러 프레임 바깥에 빠져있는) 

그 곳엔 성형외과의 이름과 위치, 연락처가 적혀 있다.


어떤 생각으로 이 광고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광고는 내게 정말 역겹게 다가온다. 

이 광고는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홍길동의 못생긴 외모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이 내러티브가 성립된다면 

홍길동이 세상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건 서자라는 사회 시스템으로 인한 출생 신분 때문이 아니라 

못생긴 외모라는 생물학적 이유 때문이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의로운 도적이 된 것도 결국 못생긴 외모 때문이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나의 도적질이 더 나쁜지, 세상의 도적질이 더 나쁜지 질문하는 이유도 

결국 그가 못생겼기 때문으로 치환된다. 


이 내러티브를 뒤집어보면, 홍길동이 만약 성형을 해서 아버지와 형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꽃미남이 된다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자신감 있게 부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화목한 가족관계가 회복되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평불만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의적도 되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도 성립된다. 

여기서 홍길동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몸짓은 안락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재와 대척점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전자는 전적으로 홍길동이 못생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되고 

후자는 홍길동이 잘생기면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덤이 된다.

이때 이 광고는 속삭인다. 

못생겨서 콤플렉스 갖고 의적이 되는 것보다는 성형해서 잘생긴 외모를 가진 다음 자신감 있게,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것이 훨씬 나은 것 아니냐고. 

당신도 그런 세상에 동참하지 않겠냐고. 

우리가 기꺼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이런 광고가 오늘날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얼마전 20대가 성형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답이 '취업때 유리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문조사는 잘 알려져있다. 

외모가 번듯한 직장, 안락한 삶,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경쟁력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혹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또는 버스와 지하철과 거리에 걸려있는 수많은 성형 광고들은 그렇게 말한다.

더욱 우울한 것은 이 광고의 콘셉트가 비단 이 홍길동에게 그치지 않으리란 추측 때문이다. 

오른쪽 아래를 보면 작은 글씨로 '호부호형 못했던 홍길동 편'이라고 적혀 있다. 

다른 시리즈가 계속 나올거란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면 또 어떤 동화와 신화와 전설이 고작 성형을 권유하기 위한 이야기로 각색될까. 

나는 이 광고가 진심으로 끔찍하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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