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지 20주년이 됐다.
20주년을 맞아 예전에 외부 기고로 썼던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계간 <대중음악 사운드> Vol.2 / 2011.04~07에 실렸던 글이다.

<대중음악 사운드>는 문화예술전문매체인 가슴네트워크에서 '대중음악 무크지' 시리즈로 기획한 잡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음악 전문 잡지를 발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그런 <대중음악 사운드>가 Vol.2에서 특집 기획으로 '한국 대중음악 파워 100'을 선정했다.
가수 뿐 아니라 제작자와 매체, 기관, 단체 등 대중음악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순위의 대상이 되었다.
대중음악과 관련된 평론가와 연구자, 미디어 종사자 등 86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이 설문에서 양현석은 3위를 차지했다.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양현석이 어떻게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됐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아래 글은 몇몇 맞춤법과 표기법만 수정한 걸 제외하면 원문과 같다.




003.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 나이/단체설립연도 : 196912(음력) / 19963월 현기획으로 출발

- 데뷔연도 : 1992서태지와 아이들멤버로 데뷔.

- 직함/직위 : YG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 선정사유 : 90년대 아이()로 시작해 2000년대 패밀리의 가장이 되다.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남한의 90년대는 1993, 김영삼 정부가 들어설 때 시작됐다.
음악적인 의미에서 90년대의 시작은 이보다 1년 앞섰다.
그러니까 1992년 봄, ‘서태지와 아이들<난 알아요>가 거리에서 정신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들고 나온 랩과 브레이크 댄스, 힙합 패션은 그 시절 너무나도 낯설거나 파격적이어서
곧바로 토픽이 되었다
. 어른들은 이게 뭐냐며 고개를 흔들었고, 소년소녀들은 바로 이것이라며 열광했다.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놓고 세대는 찢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단순한 트렌드나 유행이 아닌
하나의 현상이었다
.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렇게 90년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양현석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우선 모두가 아는 이야기. 양현석은 박남정의 백댄서 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솔로 데뷔를 하려던 서태지가 춤을 배우려고 양현석을 찾아왔고,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그 뒤 양현석은 서태지가 만든 <난 알아요>를 듣고서 팀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주노가 들어오면서 팀이 꾸려졌다. 그렇게 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양현석은 음악적으로는 랩과 백보컬을, 퍼포먼스적으로는 안무와 스타일을 담당했다.
특히 활동 초기에는 이태원을 뒤져 구한 옷들을 직접 찢어 붙이는 방식으로 의상을 준비했다.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도 얼마간 참여했는데, 1[난 알아요]<이 밤이 깊어가지만>3[발해를 꿈꾸며]<널 지우려 해>의 가사를 썼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팀을 꾸린 뒤 노래에 멜로디를 넣으라고 서태지를 설득해 지금의 <난 알아요>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팀명에서 리더의 이름이 들어갈 때 리더와 나머지 멤버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
. 호명되는 자와
호명되지 못하는 자 사이의 차이
. 이때 호명되지 못한 나머지 멤버는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래서 1996131일 팀이 해체됐을 때 양현석(과 이주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서태지의 근황만큼 큰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아이들이지 서태지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우리 역시 모두가 점성술사는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그 해에 양현석은 현기획을 설립해 힙합-댄스 그룹 킵식스를 데뷔시켰다.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프로듀싱해 내놓은 첫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때는 테이프와 CD가 아직 잘 팔리던 시절이었고, 음악 시장은 호황기였다. 인기 노래와 가수가 그만큼 넘쳐났다. 1996년은 김건모와, ‘DJ DOC’, ‘룰라의 해였고, 음반 기획자가 된 이주노의 영턱스 클럽과 강원래 구준엽의 클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SM'H.O.T'가 나온 해였다. 실패를 받아들여만 했다. 


이듬해 양현석은 회사를
‘YG엔터테인먼트로 개명해 흑인 음악 전문 레이블로 변신을 시도했다.
첫번째 결과물로 지누션을 내놓았고, 결과는 괜찮았다. 양현석 자신이 작곡한 <가솔린>으로 팬들의 주목을
이끌어냈고
, 듀스 출신의 이현도가 작사·작곡하고 엄정화가 피쳐링한 <말해줘>가 큰 인기를 얻어
각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에서
올해의 가수로 뽑혔다. 힙합 장르로는 이례적인 성공이었다.


그 다음은 예상한 대로다
. ‘지누션다음으로 나온 원타임역시 연달아 히트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소속 아티스트들을 모아
‘YG 패밀리라는 연합 프로젝트 팀을 결성했다. R&B 전문 레이블인 ‘M-Boat’와 손을 잡고 휘성과 거미, 빅마마 등 가창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2006년과 2009년에는 아이돌 그룹을 등장시켰다. 물론, ‘빅뱅‘2NE1’이다. 이 가운데 빅뱅2000년대 첫 번째 10년 동안 가장 한 팀 중 하나가 되었다.
2007
년과 2008년을 합쳐 빅뱅이 벌어들인 수익만 470억 원이었다. 이 성공은 약간 흥미롭다.
YG
의 스타일과 분위기 때문이다.


YG
SM처럼 미끈하지 않다. 그렇다고 JYP처럼 펑키하거나 섹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쿨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여기에는 힙합이라는 하위문화가 풍기는 어떤 정서가 깔려있다.
말하자면 주류문화에 대한 거부와 저항, 혹은 새로운 자리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
실제로 양현석은 빅뱅을 만들 때 관습적인 아이돌 코드를 깨트리고 싶어했다.
빅뱅은 아이돌의 지형도를 새로 그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힙합이라는 이름의 연대의식
. 다른 소속사들이 계약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개런티 없이 재계약하는 일이 가능한 이유다. 말하자면 마을(SM타운)과 국가(JYP네이션)과 가족(YG패밀리)
차이
. YG는 출연 문제를 놓고 종종 지상파 방송국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조금 더 복잡한 속내가 있겠지만)
양현석은 소속 가수들을 위한 배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굳이 미디어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YG가 끊임없이 코스닥 상장을 시도하는 모습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 주주 자본주의의 가장 큰 맹점이 바로 주주들의 단기적인 수익 분배에 신경 쓰느라
지속적인 상품 개발과 연구에 소홀하게 된다는 점 아닌가
. 하지만 여기에 대해 언급하는 건 내 영역 밖이다.)


가설
. 양현석은 빅뱅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번째 아들이 되길 바랐던 것일까. . 어쩌면, 아마도.
하지만 둘의 다른 점.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 스스로 자랐다. ‘빅뱅에겐 아버지가 있다.
양현석이라는 아버지. 음악적 아버지 없이 태어나 느닷없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이는 어느덧 (YG라는)
가족(과 아내와 딸)의 가장이 되었다. 2009YG의 매출액은 357억 원, 순이익은 41억 원이다.
SM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익이다. 물론 돈이 누군가를 평가하는 모든 잣대가 되기엔 곤란할 것이다.
그는 지금의 역할을 충분히 재미있게 잘해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인다.
세상의 질서 대신 당신의 즐거움을 찾을 것.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가장 멋진 교훈 아니었던가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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