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든 생각. 영화 <레미제라블>과 <건축학개론>은 구조적으로 유사한 결론을 갖고 있다는 공톰점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가난한 집안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승민은 우연찮게 마주한 첫사랑의 설레임을 '안전하게' 추억의 한켠으로 밀어넣고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해 편한 유학길에 오른다. 

<레미제라블>에서 귀족 집안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마리우스는 자신의 의지로 동참했던 혁명이 실패하자 '안전하게' 추억의 한켠으로 밀어넣고 귀족의 신분으로 돌아가 첫눈에 반한 코제트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른다. 

승민에게 첫사랑은 스무살 시절의 자신에게 즐거움과 설레임, 흥분과 괴로움과 좌절이라는 다양한 감정의 다발들을 느끼게 해준 존재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이끈 뮤즈. 이를테면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과 함께 펼쳐지는 풍광의 아름다움.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그 새로운 정취. 그에게 이어폰을 건네준 존재가 바로 첫사랑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마리우스에게 혁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기제이다.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사상을 몸으로 구현하려는 몸부림.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삶,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기에 그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외면한다. 심지어 첫눈에 반한 코제트와 혁명 사이에서도 그는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들은 대상에 끝까지 다가가는 것을 거부한다. 어떤 대상? 어쩌면 그들에게 운명이었을 대상. 그들의 소중한 대상은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박제가 되어 지내든가, 장발장의 생명이 꺼져가기 직전 꿈처럼 펼쳐지는 상상 속에서만 이어질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 '안전하게'.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것이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영화의 선택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왜 영화는 승민이 첫사랑과 헤어지기 직전 함께 잠자리에 드는, 말하자면 첫사랑이란 대상을 더욱 가까이 붙드는, 그러니까 그가 향유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대상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그 장면을 넣는 것을 왜 포기했을까. 또는 이를테면 왜 영화는 마리우스가 결혼 뒤에도 혁명의 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장발장의 죽임이 불러일으킨 상상 속의 혁명을 선택했을까.

만약 이것이 대상을 포기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다고 판단한 영화의 선택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들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영화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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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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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가입 환영사

쓰다 2012. 5. 1. 11:09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저는 밥 딜런이 1963년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을 듣고 있습니다바람만이 아는 노래가 들어있는 바로 그 앨범입니다. 알다시피 이 노래는 사이렌의 목소리처럼 그 시절 젊은이들을 거리로 이끌어 평화와 희망을 꿈꾸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기적처럼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음반을 집어든 이유는 간단합니다기적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적,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불현듯 이루어질 때


기적. 그것은 어떻게 찾아옵니까.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불현듯 이루어질 때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렇다면 소망은 어떻게 하면 이뤄지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방점은 간절히에 있습니다. 오직 그 부분만이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은 간절함’,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와 그녀의 맞잡은 손


그런데 이 간절함이란 함께 할수록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지난해 겨울 광화문 시위 현장. 겹겹이 에워싼 경찰에 저와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하차도 계단 한가운데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경찰에 밀려 자칫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질 뻔한 찰나, 그녀는 제 손을 있는 힘껏 쥐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가장 강력한 힘. 절대 이대로 떨어져선 안 된다는 의지. 뼈와 근육을 거쳐 가슴까지 저리게 만든 그 간절함. 그때 갑자기 경찰에 맞받아치기 시작한 사람들. 힘과 힘이 모여 거센 파도처럼 밀어붙인 결과 가까스로 되찾은 차고 맑은 공기. 그리고 그때까지도 놓지 않았던,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의 손. 여전히 숨 가쁘게 쿵쾅거리던 내 심장. 그런데,


긴 겨울, 봄의 간절함 


요즘 우리 주변에 자그만 기적 같은 모습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평소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는 개나리, 진달래, 벚나무의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겁니다. 길었던 올 겨울 추위가 한달음에 달아난 덕분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매서운 추위도 봄의 간절함을 이기지는 못하나 봅니다


기적의 행렬에 동참한 당신을 환영합니다.


우리 역시 기나긴 겨울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엄혹한 시절은 이제 곧 끝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봄을 바라왔던 든든한 후배 7명이 그 간절한 마음을 보태러 여기 모인 까닭입니다. 선배와 후배는 이제 함께 기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손과 손을 굳게 맞잡습니다. 그동안 지녔던 외로움과 무거운 짐, 이제는 우리가 함께 나눕니다. 불현듯 잔뜩 움츠렸던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 아름다운 기적의 행렬에 기꺼이 동참한 후배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진심으로.



추신: 

위 글은 2012년 4월 19일 새벽에 쓴 글이다. 

YTN 13기 후배들의 노조 가입을 환영하기 위해 썼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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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지 20주년이 됐다.
20주년을 맞아 예전에 외부 기고로 썼던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계간 <대중음악 사운드> Vol.2 / 2011.04~07에 실렸던 글이다.

<대중음악 사운드>는 문화예술전문매체인 가슴네트워크에서 '대중음악 무크지' 시리즈로 기획한 잡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음악 전문 잡지를 발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그런 <대중음악 사운드>가 Vol.2에서 특집 기획으로 '한국 대중음악 파워 100'을 선정했다.
가수 뿐 아니라 제작자와 매체, 기관, 단체 등 대중음악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순위의 대상이 되었다.
대중음악과 관련된 평론가와 연구자, 미디어 종사자 등 86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이 설문에서 양현석은 3위를 차지했다.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양현석이 어떻게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됐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아래 글은 몇몇 맞춤법과 표기법만 수정한 걸 제외하면 원문과 같다.




003.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 나이/단체설립연도 : 196912(음력) / 19963월 현기획으로 출발

- 데뷔연도 : 1992서태지와 아이들멤버로 데뷔.

- 직함/직위 : YG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 선정사유 : 90년대 아이()로 시작해 2000년대 패밀리의 가장이 되다.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남한의 90년대는 1993, 김영삼 정부가 들어설 때 시작됐다.
음악적인 의미에서 90년대의 시작은 이보다 1년 앞섰다.
그러니까 1992년 봄, ‘서태지와 아이들<난 알아요>가 거리에서 정신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들고 나온 랩과 브레이크 댄스, 힙합 패션은 그 시절 너무나도 낯설거나 파격적이어서
곧바로 토픽이 되었다
. 어른들은 이게 뭐냐며 고개를 흔들었고, 소년소녀들은 바로 이것이라며 열광했다.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놓고 세대는 찢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단순한 트렌드나 유행이 아닌
하나의 현상이었다
.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렇게 90년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양현석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우선 모두가 아는 이야기. 양현석은 박남정의 백댄서 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솔로 데뷔를 하려던 서태지가 춤을 배우려고 양현석을 찾아왔고,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그 뒤 양현석은 서태지가 만든 <난 알아요>를 듣고서 팀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주노가 들어오면서 팀이 꾸려졌다. 그렇게 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양현석은 음악적으로는 랩과 백보컬을, 퍼포먼스적으로는 안무와 스타일을 담당했다.
특히 활동 초기에는 이태원을 뒤져 구한 옷들을 직접 찢어 붙이는 방식으로 의상을 준비했다.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도 얼마간 참여했는데, 1[난 알아요]<이 밤이 깊어가지만>3[발해를 꿈꾸며]<널 지우려 해>의 가사를 썼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팀을 꾸린 뒤 노래에 멜로디를 넣으라고 서태지를 설득해 지금의 <난 알아요>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팀명에서 리더의 이름이 들어갈 때 리더와 나머지 멤버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
. 호명되는 자와
호명되지 못하는 자 사이의 차이
. 이때 호명되지 못한 나머지 멤버는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래서 1996131일 팀이 해체됐을 때 양현석(과 이주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서태지의 근황만큼 큰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아이들이지 서태지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우리 역시 모두가 점성술사는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그 해에 양현석은 현기획을 설립해 힙합-댄스 그룹 킵식스를 데뷔시켰다.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프로듀싱해 내놓은 첫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때는 테이프와 CD가 아직 잘 팔리던 시절이었고, 음악 시장은 호황기였다. 인기 노래와 가수가 그만큼 넘쳐났다. 1996년은 김건모와, ‘DJ DOC’, ‘룰라의 해였고, 음반 기획자가 된 이주노의 영턱스 클럽과 강원래 구준엽의 클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SM'H.O.T'가 나온 해였다. 실패를 받아들여만 했다. 


이듬해 양현석은 회사를
‘YG엔터테인먼트로 개명해 흑인 음악 전문 레이블로 변신을 시도했다.
첫번째 결과물로 지누션을 내놓았고, 결과는 괜찮았다. 양현석 자신이 작곡한 <가솔린>으로 팬들의 주목을
이끌어냈고
, 듀스 출신의 이현도가 작사·작곡하고 엄정화가 피쳐링한 <말해줘>가 큰 인기를 얻어
각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에서
올해의 가수로 뽑혔다. 힙합 장르로는 이례적인 성공이었다.


그 다음은 예상한 대로다
. ‘지누션다음으로 나온 원타임역시 연달아 히트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소속 아티스트들을 모아
‘YG 패밀리라는 연합 프로젝트 팀을 결성했다. R&B 전문 레이블인 ‘M-Boat’와 손을 잡고 휘성과 거미, 빅마마 등 가창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2006년과 2009년에는 아이돌 그룹을 등장시켰다. 물론, ‘빅뱅‘2NE1’이다. 이 가운데 빅뱅2000년대 첫 번째 10년 동안 가장 한 팀 중 하나가 되었다.
2007
년과 2008년을 합쳐 빅뱅이 벌어들인 수익만 470억 원이었다. 이 성공은 약간 흥미롭다.
YG
의 스타일과 분위기 때문이다.


YG
SM처럼 미끈하지 않다. 그렇다고 JYP처럼 펑키하거나 섹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쿨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여기에는 힙합이라는 하위문화가 풍기는 어떤 정서가 깔려있다.
말하자면 주류문화에 대한 거부와 저항, 혹은 새로운 자리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
실제로 양현석은 빅뱅을 만들 때 관습적인 아이돌 코드를 깨트리고 싶어했다.
빅뱅은 아이돌의 지형도를 새로 그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힙합이라는 이름의 연대의식
. 다른 소속사들이 계약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개런티 없이 재계약하는 일이 가능한 이유다. 말하자면 마을(SM타운)과 국가(JYP네이션)과 가족(YG패밀리)
차이
. YG는 출연 문제를 놓고 종종 지상파 방송국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조금 더 복잡한 속내가 있겠지만)
양현석은 소속 가수들을 위한 배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굳이 미디어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YG가 끊임없이 코스닥 상장을 시도하는 모습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 주주 자본주의의 가장 큰 맹점이 바로 주주들의 단기적인 수익 분배에 신경 쓰느라
지속적인 상품 개발과 연구에 소홀하게 된다는 점 아닌가
. 하지만 여기에 대해 언급하는 건 내 영역 밖이다.)


가설
. 양현석은 빅뱅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번째 아들이 되길 바랐던 것일까. . 어쩌면, 아마도.
하지만 둘의 다른 점.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 스스로 자랐다. ‘빅뱅에겐 아버지가 있다.
양현석이라는 아버지. 음악적 아버지 없이 태어나 느닷없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이는 어느덧 (YG라는)
가족(과 아내와 딸)의 가장이 되었다. 2009YG의 매출액은 357억 원, 순이익은 41억 원이다.
SM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익이다. 물론 돈이 누군가를 평가하는 모든 잣대가 되기엔 곤란할 것이다.
그는 지금의 역할을 충분히 재미있게 잘해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인다.
세상의 질서 대신 당신의 즐거움을 찾을 것.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가장 멋진 교훈 아니었던가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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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여행길에 음반 가게에 들렀다.
방콕의 시암이란 곳에 파라곤이란 대형 쇼핑센터가 있다. 
우리로 치면 타임스퀘어쯤 된다.
그곳 레코드샵 역시 규모가 꽤 컸다.
살펴보니 한쪽 구역에 케이팝 CD가 진열돼 있었다.
해외 레코드 가게에 K-pop CD가 판매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꽤 신기했다.

이것이 신기한 이유는 CD 판매가 (공연 수익과 더불어) 실질적인 인기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질적이란 뜻은 말 그대로 산업적인 의미에서 자본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K-pop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이유로 흔히 꼽는 것이 유튜브와 SNS이지만,
이는 홍보의 수단일 뿐이지 하나의 산업구조, 수익 모델은 아니다. 
사고 파는 구조가 정착이 될때 K-pop은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K-pop이 산업으로 인정받을때 K-pop은 사실상 한류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 K-pop이 제2의 한류다, 유럽을 점령했다, 따위의 카피는 그냥 헛소리다. 

고상한 척 문화산업이라고 하지만, 사실 여기서 방점은 문화가 아니라 산업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YG가 지난해 주식 상장을 하자 마자 양현석이 그해의 신규 주식 부자 연예인으로 떠오를 수 있겠는가.
어쨌든, 방콕에는 K-pop CD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이 레코드샵에는 K-pop 섹션이 따로 있진 않았다.  
POP, ROCK, OST, 또는 NEW RELEASE, 아니면 IMPORTED  BLU-RAY라는 섹션까지 있었지만
K-pop 섹션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일본의 J-pop과 중국의 C-pop이 한데 섞여 있었다.





2PM의 명백한 짝퉁으로 보이는 JPM이란 C-pop 보이그룹도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짝퉁이 존재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바로 인기이기 때문이다.
K-pop의 인기가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원형 기둥의 한쪽 귀퉁이에 K-pop만 전시된 구역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는 정식 섹션이 아니라 프로모션의 성격이 강해보였다. 
실제 수요가 뒷받침 됐기 때문에 이런 진열을 한 것인지, 홍보용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K-pop 가수가 광고모델이 된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2PM의 닉쿤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스트가 과자 광고를 하는 포스터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K-pop의 인기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영어가 짧은 탓인지, 원래 성격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한마디 툭 던졌다.
"물론. 저거 안보여?"
그가 가리킨 손가락에는 소녀시대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진으로 담진 못했지만 K-pop 진열대에
우리나라 인디 뮤지션의 음반을 발견한 것은 또다른 수확이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칵스의 첫번째 미니앨범 <Enter> 였다.

태국에서 K-pop은 확실히 하나의 장르로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장르는 어디까지나 J-pop이나 C-pop의 또 다른 분류였다. 
이는 해외의 K-pop 팬들에게 어떻게 K-pop을 알게 됐냐고 물었을때 
한결같이 J-pop을 듣다가 알게 됐다고 대답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기도 했다.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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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바버라 애런라이크 / 부키 /  2011년 4월


보지 않은 책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때가 있다. 
<긍정의 배신>도 그런 경우였다.
문화부 출판 담당 기자 앞으로 온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오! 당신들의 나라>를 들춰보고선
이 저자가 <긍정의 배신>을 쓴 걸 알게 됐고, 
나도 모르게 '아, 그 책!' 하고 가볍게 외쳤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될 때가 있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는, 
혹은 이미 알고 있어서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의 세계란 어쩐지 그런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쯤 뒤. 
나는 방황하듯 서점을 돌아다녔고, 
의도치 않게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긍정의 배신.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오늘날 서점가를 유령처럼 휩쓸고 있는 자기계발서와 
(결국 자기계발서의 또 다른 판본인) 심리학 서적이 찬양하는 정서.
혹은, 오늘날 시장과 이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노력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갖춰야 하는 에티튜드라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바로 그 무드.
'간절히 바라면 이룰 수 있다'는 마법과도 같은 정언명령. 
그냥 그건 한 마디로 사기다.






왜 그럴까. 
<긍정의 배신>은 여기에 대해 말한다.

미국인은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고정관념에 따르면 미국인은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이고, 천박하다.
그런데 최근 행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각 나라 사람들의 상대적 행복도를 측정해 봤는데 결과는 이상했다. 
그다지 행복한 축에 끼지 못한 것이다. 경제가 한창 잘 나갈때 조차.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23위 정도였다.
네덜란드인, 덴마크인, 말레이시아인, 핀란드인보다 낮았다.
2006년 영국 신경제재단이 측정한 행복지수에서는 150위 였다.
심지어 세계 우울증 치료제의 2/3는 미국에서 소비된다.

그런데도 왜 미국인들은 긍정적인가? 혹은 긍정적으로 보이는가?
'긍정적 사고'라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노력을 해야 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생각은 낙천적인 감정을 낳고,
한발 더 나가 실제로 행복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중요하다.
이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다.
저절로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긍정적 사고가 올바른 것이어서 우주가 행복과 충만함으로 향하고 있다면
굳이 긍정적 사고 훈련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미국인들이 원래부터 긍정적 사고를 예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 미국을 사로잡은 정서는 칼뱅주의였다.
칼뱅주의는 무엇보다도 엄격한 자기 규율과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다.
만족을 뒤로 하고 향락의 유혹에 저항해 열심히 부를 쌓으라는 가르침.
그리고 이 윤리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
이 둘의 관계에 관한 고전이 바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런데 미국은 건국 과정에서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미국의 예외주의와 연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행위는
끊임없는 자기 통제와 규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칼뱅주의와 일치한다.
아니, 칼뱅주의의 또 다른 판본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다른 말로 소비자 자본주의는 
긍정적 사고와 훨씬 죽이 잘 맞았다.
소비자 문화는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부추기고,
긍정적 사고는 소비자들에게 '당신은 더 많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고,
정말로 원하고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면 실제로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반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것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성공이란 필연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하는 것이다.

긍정적 사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경제의 과잉을 변명하고 잘못을 덮어주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를 장려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경영 코치', '라이프 코치'가 그 예다.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은 기업이다.
피고용인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그들은
"긍정적 사고를 가지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냐"며
긍정적 사고를 하라고 교육받는다.
이 교육으로 효과를 얻는 쪽은 피고용인들이 전혀 아니다.
실질적인 효과는 회사(와 기업에게서 돈을 받는 강사)가 얻는다.
내가 해고되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이고,
정리해고 뒤 남은 이들은 교육을 통해 일종의 결속력을 얻게 된다.

긍정적 사고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의료, 종교, 학계에도 퍼져 있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를 챕터별로 나눠 경험담과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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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일혁

,
최효종을 만났다.
어렵게 만났다.
인터뷰를 주저해왔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관심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부담은 강용석 국회의원이 건네줬다.
강용석 의원은 최효종의 개그가 국회의원 전체를 모욕했다며 고소를 했다.
최효종은 개그콘서트의 코너인 사마귀유치원에서
'국회의원 되는거 어렵지 않아요,
선거철만 되면 평소 잘 가지 않는 시장에 가기만 하면 돼요' 라며
국회의원에 대한 풍자 개그를 선보였다.

심지어는 강용석이 최효종을 고소하자 
개콘 코너 곳곳에 강용석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반응은 아주 좋았다. 
풍자 개그는 씨가 마르던 상황이었고, 
정치에 대한 불신과 정부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레임덕에 직면한 정부를 상대로, 그리고
당적을 박탈당하고 유효기간이 다 된 국회의원을 상대로  
조롱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어쨌든 시청자들이 열광해주었다는 데 있다.
시민이 열광하는 대상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은 기자에 있어 일종의 의무이다.
그 때문에 어렵사리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긴 어려웠다.

대신 조건이 따랐다.
강용석 의원과 관련된 질문은 하지 말 것.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말란 질문을 곧이 곧대로 안하는 것 또한 직무유기다.
따라서 관건은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아프거나 다치게 하지 않고
풍성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가 이다.

만약 최효종의 답변이 충실하지 못했다면
그가 불성실한 것이 아니다.
나의 질문이 그만큼 충실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인터뷰는 12월 3일 토요일,
광고 CF 현장에서 이뤄졌다.

아래 두 영상은 이날 최효종이 찍은 CF의 완성본이다. 





그리고, 

방송으로 나간 인터뷰는 여길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아래는 방송으로 나간 인터뷰와 그렇지 않은 인터뷰까지 함께 정리한 내용이다.


올해는 최효종의 해이다. 사랑 받는 소감이 어떤가?

사랑받았다기 보다 여러 배경들이 맞아 떨어졌다 생각한다. 
올 한 해 있었던 좋은 영광들을 빨리 잊어버리고
2012년 좋은 개그를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다. 


시사 개그가 인기를 얻고 있다. 배경이 어디에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시사 개그가 방송에 안됐기 때문에
시청자 여러분들이 자연스럽게 원한 것 같고
내년 선거도 있고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슈가 된 것 같다.


뼈가 있어야 개그라고 얘길 한 적 있다. 어떤 뜻인가?

뼈가 있다는 뜻이 누굴 비판한다거나 사회 안좋은 점을 꼬집는다는 게 아니다.
뼈라는 건 아무 생각없이 뱉는 얘기가 아니라
시청자 여러분이 들었을 때 재해석이 가능한 개그를 하자는 뜻이다.
굳이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혹은 개그의 퀄리티 라는 것이 
높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드린 말이다.


최근 일로 힘들었겠다.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줬을 것 같은데?
 
힘들진 않았다.
육체적으로 고문 당한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외부적으로 물어보는 말이 많으니까 스트레스가 많더라.
어떠냐,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니까 그게 좀 피곤하고
주위에 있는 분들이 힘들어하니까 그게 더 속이 상했다.
그런데 개콘 식구들이 가장 많이 힘을 줬다.
오히려 전화위복이다, 너란 존재를 알리는 좋은 기회다고 생각해라, 고 말했다.
담당 피디나 작가진이 힘이 됐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개콘이 복수를 가했다.
시청자 중에는 후련함을 느낀 사람도 많았다.
짜릿함이 느껴질 만도 했는데 어땠나?
 
그 역시 코너에서 말씀드렸지만 직접 공격하겠단 마인드는 아니었다.
매주 핫한 트랜드를 다루는게 개콘이니까 
그 부분은 보는 분들이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다.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온다면?
 
아예 상상조차 안했다.
그쪽으로 아무것도 모르는데 생각 없다.


다른 시사 코너 계획도 있나?
 
기획을 해서 시사코너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그를 짜다보면 그 안에다 어떤 메시지를 담는 거다.
개콘은 전부 그렇다.
애정남 같은 경우도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게 있는거다.
애매한 걸 정해준다고 하지만 결국은 
지켜야할 기본적인 상호간에 없어진 개념들을
바로잡자는 콘셉트가 있는거다.
사마귀 유치원 같은 경우도 유치원 콘셉트로 재미있게 해서
현실을 직설적으로 얘기할 만한 게 없을까 해서 짜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시사와 풍자가 들어간거고.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시사 풍자 코미디를 짠다는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개그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하겠다.


앞으로 어떤 개그맨 되고 싶나?

제일 좋은 건 국민여러분 모두에게 사랑 받는거다.
그게 어렵다면 90%, 80%라도. 
내가 하는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면 좋겠다는 게 가장 큰 꿈이다. 


PS. 최효종은 오늘 (2011년 12월 27일) YTN 라디오와 전화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참고로 스크립트와 다시듣기 사이트 링크를 걸어둔다.
      스크립트 
      다시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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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양일혁

,
JYJ 베를린 공연을 이틀 앞둔 4일 오후 인터뷰를 했다.
방송에서는 활용하지 못했지만 몇가지 좋은 말들이 있어 여기에 대신 기록해 둔다.

(사진제공: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올해의 마지막 월드 투어다. 어떤 점을 어필할건가?

준수 : 이번 투어는 새로운게 아니라 월드와이드 앨범의 연장선상이다.
        이번 투어에서 특별히 바꾼 건 없다.
        대신 유럽 댄서 분들과 같이 서게 됐다.
        스페인에서 유명한 연예인 (라파 데먼즈) 이다.
        유럽에 맞는 정열적인 춤을 춰서 아크로바틱한 기술들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런 춤들을 공연에 접목 시켰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부분이다.




다른 기획사의 합동 공연과 달리 첫 단독 유럽 공연이다.
내러티브가 가능한 게 차이점이라고 언급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준수 : 기획사의 기획 공연은 여러 가수가 나와서 대표곡만 부르고 끝내는 공연이다.
        하지만 JYJ는 토크나 대화로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다.
        거기서부터 다르다.
        댄스곡 발라드곡이 주는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가수들이 자기 곡만 부르고 빠지다 보면 댄스에서 발라드 넘어갈 때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런 점이 다르다.
        다른 의미로 보면 기획사의 타이틀을 다는게 아니라 유럽 타지에서 팀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스페인과 독일에 첫 물꼬를 튼 점만 봐서도 뜻깊다.

 
유럽에 와보니 실제로 케이팝의 열기가 느껴지나?

재중 : 우리가 알고 있는 케이팝의 열기가 과장된건 아닌가 싶다.
        태국 일본 중국은 길거리만 돌아다녀도 케이팝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반을 파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실 유럽에선 공연장 주변이면 모를까 어떤 스타가 사실 그 열기를 느끼긴 힘들다.
        지금은 케이팝이란 시장이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다.
        불이 지펴지려고 하고 있다.
        한류를 좋아해주는 마니아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층이 두터워지다 보니 
        한국에선 케이팝의 열풍이다고 부르는 거다.
        그렇게 열풍이 부니까 케이팝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거다.
        우리 같은 경우는 단독 공연이다 보니 소규모 공연이다.
        수익은 없는 공연이다.     
        사실 수익이 창출되지 않으면 그 다음 공연이 없다고 본다.
        수익이 있어야 다음 공연이 되는거니까.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보고 공연하는 거다.




스페인 관중의 반응은 어땠나?

유천 : 한 나라의 팬을 보면 그 나라가 좀 보인다.
        스페인의 문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보는 열정과는 다르게 파워풀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 나라에선 공연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무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느낌도 커질 것 같다.
        
준수 : 그런 힘을 팬들이 끄집어 내줬다.
        끝나고 나니 뭔가 낼 수 잇는 힘 그 이상을 낸 듯 했다.
        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될 그런 힘을 끄집어 내게 됐다.

유럽에서 이렇게 공연하면 국위선양 한다는 마음도 들 것 같은데?

유천 : 우리가 잘나서란 생각이 아닌게 책임감도 책임감이지만 더 나아갈 길들이 주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안주하지 않게 되는 공연이다.
        유럽 공연은 거품없이 솔직한 면 보이려고 한다.
        우린 유럽에서 이렇게 잘나간다, 그런 기사에 쑥쓰러워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려 한다.

재중 : 아시아의 스타 가운데 유럽에서 첫 공연 하면서 
        작은 공연장에서 거품없는 솔직한 공연을 보여줄 수 있는 아티스트가 몇이나 될까.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하더라도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게 싫다는 거다.




더 나아갈 길이란게 무슨 뜻인가?
 
재중 : 일본에서 공연할 때 한 번 공연에 20만 명 정도가 왔다.
        오사카 두 번, 도쿄 두 번 이렇게 네 번을 투어를 돌면 거의 백 만이 들게 된다.
        그런 큰 공연장에서 하다보면 우리 자신들 조차 '앞으로 더 큰 곳은 어디에 있을까', '더 올라갈 곳은 어딜까'
        그런 안주하는 마음에 자만심이 생기게 된다.
        아티스트에게 더이상 목표가 없다면 괴로운 거다.
        그랬다가 다른 나라에 소규모 공연을 가고 관객석에서 빈 자리를 봤을때,
        허탈한 마음이 아니라 더 이상의 목표가 생기는 듯하다.
 
준수 : 일본에서도 우리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점점 인기가 탄탄해지는 걸 느끼면서 결국 그랜드 슬램까지 달성하게 됐다.
        유럽에서도 지금 이렇게 공연하는게 옳은 시작이다.


 
 
한국 음악 프로그램에 못나가는 건 힘들지 않나?

준수 : 우리가 인기가 없는 식으로 무시하는 말이 들릴때 마음이 아프다.
        자기들 말을 입증하기 위해 팬들 수치를 낮춘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비하하는게 마음이 아프다.

떨어진 멤버들과의 미래는 어떤 관계로 흐를 것 같나?

유천 : 어렸을때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젝스키스처럼 깨진 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합하는게 어려운 건가?
        어렵더라.
        우리 다섯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다. 


WRITTEN BY
양일혁

,
이상한 일이다.
멧돼지가 자꾸 바다로 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엄을 친다.
누구는 그러다 지쳐서 죽고,
또 누구는 사람들에게 잡아 올려져서 죽음을 당한다.
이래저래 죽는다.


<출처: 연합뉴스>

 
멧돼지가 바다로 뛰어드는데 뾰족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멧돼지는 도망갈때 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경향] 멧돼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 클릭)

숫자는 불어나고,
먹이는 없고, 
그래서 마을로 내려오고,
농작물을 휘젓고,
본의 아니게 사람도 위협하고,
그 때문에 포획꾼에게 쫓기고,
자꾸 달리다 보면 바다가 나오고,
그리고 벼랑 끝에서 내려야만 하는 마지막 선택.
'풍덩.'

<출처: 연합뉴스>

왠지 멧돼지의 신세가 처연해진다.
농작물 피해를 입거나 다치신 분들에게는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어쩐지 안쓰럽다.
천적이 없어서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이 멧돼지의 잘못은 아니니까.
개체수가 늘어나서 먹을게 부족해지는 것이 멧돼지의 실수는 아니니까.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 멧돼지의 오판은 아니니까.


<출처: 연합뉴스>

무엇보다도 물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는 제스처.

이 때 묘하게 겹쳐지는 이미지.

한강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출처: YTN>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 동안 
한강에 투신한 사람은 모두 892명이었다. 
이 가운데 375명이 숨졌다.
이틀에 한번 꼴로 투신을 한 셈이다.

그들 가운데
몸을 던지고 싶어서 던진 사람, 누가 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떠밀리듯 그곳에 온 것 아닌가.
일자리가 줄어들어 직업을 얻지 못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니까.
직업을 얻지 못해 생활이 궁핍해지는 것이 그 사람의 실수는 아니니까.
빚에 허덕이면서까지 무언가를 해보려 애쓴 것이 그 사람의 오판은 아니니까.

그나마 인간은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다.
한강에 뛰어드는 것은 제발 내 처지를 알아달라며 사회에 절규하는 간절한 호소다.
그렇지만 멧돼지의 하소연은 누가 들어줄까.

그들의 고통.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

아니, 어쩌면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눈 막고 귀 막고 있단 점에서 
우리는 결국  멧돼지와 별 차이가 없다면 어떡할 것인가.


WRITTEN BY
양일혁

,
아이슬란드에서 온 베스투르포트 극단의 <파우스트>를 보았다. 
연극 담당은 아니지만 담당 기자의 부탁으로 우연히 보게 됐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원래 연극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의 또 다른 변주인 뮤지컬을 포함해)
몇 편 연극을 보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영화를 보는 뇌로 연극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때 연극은 시시해지기 시작한다. 
단적인 예로 연극에는 클로즈업이 없다.
아, 클로즈업 된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이 주는 강력한 정서란.
연극에는 줌도 없다. 팬과 틸팅도 당연히 없다.
컷과 컷으로 이어지는 몽타주는 말할 것도 없다.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영화와 달리 연극 만이 가진 감흥은 무엇인가.
굳이 스스로 찾아 헤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는 그 감흥의 근원을 알지 못했다.
오늘 <파우스트>를 보기 전까진. 






<파우스트>의 특징은 국내에서 제목에다 덧붙인 '아크로바틱'이 아니다.
그저 아크로바틱이 문제였다면 그것은 그저 서커스에 불과했을 것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아크로바틱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그것은 바로 무대공간이다. 
공중에 쳐진 대형 그물.
만약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무대 바로 위에 그물이 쳐져 있다면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물의 크기는 가로가 11m, 세로가 15m에 이른다. 
쉽게 말해 객석 위를 뒤덮는다는 얘기다.
배우들은 무대와 그물 사이를 종횡무진, 동분서주, 설왕설래하며 오간다.

이때 그물은 배우들의 아크로바틱한 연기의 전시장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 창조된 무대의 공간이다.
극중에서 젊은 요한이자 아스모데우스를 맡았고,
작가이자 베스투르포트 극단의 공동 설립자인 뵈른 홀리누르 해럴드손은
이를 두고 '공간의 탐험'이라고 불렀다.

없던 공간이 새로 생겨나면 연출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연출의 새로운 가능성은 새로운 미학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때 매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악마들이 어슬렁거릴때 그물은 지옥이 된다.
그때 관객은 지옥의 밑바닥에서 꼼짝없이 악마들을 바라봐야 한다.
여기에 그물의 탄력이 더해지면서 악마들의 걸음은 더욱 기괴한 낯선 움직임이 된다.
 
파우스트의 구애로 인해 그레타와 그녀의 오빠가 그물 위에서 갈등을 빚을 때
그때 관객은 집 안 바닥에서 그들을 올려다봐야 한다.
그들의 갈등이 전하는 파국의 감정은 훨씬 불길해진다.

무대를 내려다보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말하자면 신의 관점에서 어린아이의 관점으로의 전환.
이 차이가 전해주는 정서의 오르내림.
이것은 너무나 새로운 체험이다. 

앞서 언급했던 해럴드손은
"할 수만 있다면 관객 모두를 그물 위로 떨어지도록 이끌고 싶었다.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새로운 체험을 공유하고 싶었다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아이슬란드란 추운 나라에서 온 것 치고는 너무나도 따뜻했다. 

[ YTN : 파우스트, 공중을 넘나들다 ] (-> 클릭)  

추신.

<파우스트>에 음악 얘기를 지나치기 어렵다.
물론 조지 마이클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도 있지만
극에서 악마의 유혹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포스트 펑크 스타일의 음악이다.
이는 닉 케이브와 워렌 엘리스, 이 둘의 공동 작업이 이끌어낸 결과다.
이 둘은 코맥 매카시 원작의 영화 <더 로드>에서도 작업했다.
이중에서 닉 케이브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빔 벤더스가 록 음악광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WRITTEN BY
양일혁

,
엑스재팬이 한국에 왔다.
이게 조금 특별한 이유는 85년에 데뷔해 26년만에 처음 왔기 때문이다.

인터뷰 자리에는 리더를 맡고 있는 요시키가 홀로 참석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왜소한 체구. 그리고 굉장히 여성스러운 말투와 제스처.
무대 위 강렬하게 연주하는 모습만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요시키의 모습이 당혹스러운 정도로 낯설었다.

하지만 가장 낯설었던 것은 그가 사용한 언어였다.
왜 일본어가 아닌 영어를 굳이 구사했을까. 
악센트에는 물론 일본어가 묻어 있었다.

이와 함께 적당히 긴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분칠이 되어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받았던 첫 느낌은
그는 혹시 일본인이 아닌 서양인처럼 되고 싶은게 아닐까, 였다.

마침 기자회견장에 함께 있었던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 잭슨을 보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럴지도.

그들 역시 한때 신화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엑스재팬이 소비되는 방식과 관계가 깊다.
엑스재팬의 공연 모습을 보면 이건 마치 어떤 비밀결사의 제의에 참석한 기분이 든다.
다른 밴드는 잘 모르겠는데 엑스재팬의 팬을 보면
단순히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 '숭배한다'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특별했다.
아직 밀레니엄이 도착하지 않았던 세기말, 
일본 문화는 아직 정상적으로 유통되기 전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적대적인 감정 역시 감당하기엔 벅찼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엑스재팬 같은 제이팝, 스튜디오 지브리나 가이낙스의 에반게리온 같은 저패니메이션은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 은밀하게 거래됐다.
이같은 소비 방식은 자연스럽게 공통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결속 의식을 낳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엑스재팬은 한국팬들에게 더욱 신비스러운 숭배의 대상이 되어갔다. 

하지만 히데의 죽음과 해체를 거치며 엑스재팬은 활동을 중단했다. 
세월의 더께는 쌓여만 갔고, 
그런 가운데 또 다른 멤버 타이지의 사망 소식은 팬들에게 그저 안타까운 짧은 탄식만 남겼을 뿐이다.
재결성 뒤 간간히 보게 된 영상 속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예전의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럴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난 타이지가 낯설어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 공연하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번 주말 펼쳐지는 그 무대.
누군가에겐 신화를 마주하는 기쁨이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한때 누렸던 추억과의 재회가 될 것이다.

26년만의 조우란 건 어떤 기분일까. 

[YTN, 엑스재팬, "내일이 없는 것처럼!"] (-> 클릭) 

WRITTEN BY
양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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